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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살의 조력자들…새정치도 예외일 순 없다 [곽병찬 대기자의 현장칼럼 창]
곽병찬 대기자의 현장칼럼 창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유서대필 사건’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사진은 2014년 2월12일, 고등법원에서 ‘유서 대필’ 조작 사건 무죄 판결을 받은 뒤의 강기훈 씨 모습.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대법원이 유서대필에 대해 무죄 선고하던 날, 강기훈은 재판정에 나오지 못했다. 그는 어딘가에서 시시각각 찾아오는 죽음과 힘들게 싸우고 있었다. 유서대필이라는 기상천외의 조작 사건은 그의 영혼을 갈갈이 찢어놓았고, 악성 종양까지 불러들여 몸마저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는 24년 동안 서서히 아주 고통스럽게 타살되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아주 고통스럽게 타살되고 있었다
이제 와 결백이 드러나고 반인륜 패륜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저 처절한 말기암의 고통을 손톱만큼이나 줄일 수 있을까. 자살을 조종당한 것으로 조작된 고 김기설씨도 마찬가지다. 지난 24년 그의 의분은 개죽음으로 외면당했고, 그는 패륜 집단의 하수인이라는 낙인 속에서 지워져야 했다.
반면 유서대필 조작을 통해 정권은 그 야만적 폭력과 인권유린, 음흉한 거짓과 사기를 묻어버렸다. 사건의 인화점이었던 1991년 4월 백주대낮에 도로에서 경찰특공대 백골단이 강경대씨를 쇠파이프로 두들겨패 죽인 사건도 묻어버렸다. 대학생 강씨의 꿈과 열정도 휴지 조각처럼 구겨 버릴 수 있었고, 유족들의 참담한 고통도 간단히 치워버릴 수 있었다. 도대체 무죄 확정이 고통만 남은 그들의 삶에 무엇을 보상할 수 있을까.
강씨가 무참하게 타살된 뒤 전남대 박승희씨를 시작으로 안동대 김영균씨, 경원대 천세용씨가 분신했다. 공권력의 살인은 박종철씨에 대한 고문살해, 이한열씨에 대한 최루탄 피살이 일어났던 1987년 이전으로의 회귀를 알리는 것이었고, 그것은 6월 민주항쟁에 대한 타살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잇따른 분신과 투신은 그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었다. 그것을 반인륜 집단의 기획자살로 몰아가는 데 물꼬를 튼 것은 적지 않은 그 타살의 조력자들이었다.

1991년 4월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씨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 행렬이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출발해 명지대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지하씨는 죽음이 있고 난 뒤 <조선일보> 기고문을 통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호통을 쳤다. 정치적 목적 실현을 위해 인간 생명을 제물로 삼아 선전선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정권의 폭력에 대한 싸움은 죽음의 굿판이 되었고, 희생자들은 기획된 제물이 되었고, 재야 인사들은 죽음의 기획자가 되었다. 병색이 완연한 글 한 편이 그들의 진정성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불과 4년 전 전두환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박정희로부터 이어져온 폭력의 시대에 일단락을 지었던 6·10항쟁과 시민들의 헌신을 정권이 타살하는 빌미가 되기엔 충분했다.
23년 뒤에도 그들의 ‘후안무치’는 바뀌지 않고 있다
김씨의 글에 용기백배했던 정권은 5월8일 김기설씨가 투신하자, 이른바 “조직적 배후세력”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했다. 6월 항쟁의 타살에 대해 절망한 이들의 죽음을 그들은 죽음의 기획자가 조종한 정치적 사건으로 조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서대필 조작은 그렇게 김씨의 붓끝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덮어씌운 ‘시체 장사’라는 매도 역시 그 연원을 따지면 이 조작 사건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이 글을 게재했던 신문은 대법원의 무죄 확정에 대해 ‘대법원의 판결은 존중하지만, 진실은 본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투로 사설에서 썼다. 무슨 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뒤틀고 빈정거리는 것만은 분명했다. 대법원은 23년 만에 저희들 판결은 뒤집었지만, 이렇게 저 조력자들의 후안무치를 바꿀 순 없었다. 하긴 저희의 잘못도 반성하지 않는데, 주범인 검찰과 그 조력자들 누가 참회할 것인가.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 조력자들의 빈정거림만 들릴 뿐.
유서대필 조작은 언제든 무엇이든 조작될 수 있다는 대중적 기만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었다. 23년이 지난 지금, 누가 거짓말을 잘하는가의 게임으로 바뀐 정치는 그 결과였다. 믿게끔 거짓말만 하면 선거에서도 승리하고 권력도 쥘 수 있고, 거짓말만 잘하면 권력의 사유화, 권력의 남용, 국정 농단, 권력의 집단적 부패도 용인되는 세상이 되었다. 거짓말에 능숙하면 유능이 되고, 거짓말에 미숙하면 무능이 되었으며 원칙에 충실하면 바보가 되고, 변칙에 충실하면 현자가 되었다. 이에 따라 권력이건 매체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게 되었고, 정치는 쇼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별은 빛난다는 진술은 거짓이 되었고, 진실은 승리한다고 진술하는 자는 바보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는 온갖 거짓말 경연이 펼쳐졌다. 공적 연금 개혁 논란은 숫자 조작으로 점철됐다. 선거 부정은 거짓말의 유무능에 의해 정치적 유무죄가 판결났다. 진실은 언제 어디서나 거짓에 의해 타살을 당했다. 그나마 이 나라의 작은 자존심이었던 부산영화제마저, 그 얄팍한 거짓말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야당이 존재 의미를 잃으면서 희망도 타살되고 있다
조력자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야당 정치인들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당이 집권을 포기하고, 정치인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는 순간 야당은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집권 의지를 가질 때 견제도 가능하고, 감시도 가능하고, 정책 대안의 생산도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의 야당 정치인들은 대부분 집권 의지를 포기했다. 생존 본능, 공천받아 다시 재선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이들이 동원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자멸을 재촉하는 거짓말. 그사이 유서대필을 포함해,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권과 생명, 진실과 희망의 타살은 이루어졌고 진행되고 있다. 그들 또한 타살의 조력자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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